유물유적

울산박씨 시관조(始貫祖) [흥려백 장무공 박윤웅(朴允雄)]

장무공[박윤웅(朴允雄)]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31세손이다.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흥려백(興麗伯)에 봉하여지면서  울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는데, 처음에는 흥려박씨(興麗朴氏)’라고 하다가 울산박씨(蔚山朴氏)’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사(高麗史)57 지리지의 경상도 울주 편에 “[고려] 태조(太祖)[왕건(王建)] 때 이 고을 사람  박윤웅이 큰 공적을 세웠으므로, 하곡현(범서,효문,양정 중구일원)·동진현(강동,농소,송정,염포,동구일원)·우풍현(웅촌면).임관군(모화리).동안군(서생면,온산,온양읍) 등의 5개 군 현을 병합하여  흥려부(興麗府)[흥례부(興禮府)]를 두었다.”라고 하였다. 박윤웅은 달천광산(達川鑛山)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을 제련하는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무기를 생산하여 군사적 힘을 기른 뒤 울산 해안의 무역을 장악하며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신라 후기 울산은 태화강과 회야강 등을 통한 내지 교역과 울산항을 통한 해상 무역으로 많은 이윤을 축적할 수 있는 곳이었다. 고려사1의 태조 13(930) 9월 기사에 울산에서 최환을 보내어 귀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에 귀부한 이후 장무공(박윤웅)은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울산군 편에 고려 때 [울산에는] 신학성장군(神鶴城將軍박윤웅이 있었다. 변통의 술수에 능하고, 주변을 토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태조를 도와서 왕업을 이루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흥려승람(興麗勝覽)"에 따르면 박윤웅은 신라 후기와 고려 전기 울산 지역의 호족으로, 왕건의 고려 건국하는데 큰 공로로 인정받아 정5품 흥려백에 봉하여졌다. 효공왕 5(901)신학성에 장무공(박윤웅)이 터를 잡았다.”라고 되어 있다. "흥려승람"등 에는 박윤웅이 귀부의 대가로 농소 지역의 채지와 유포의 곽암(藿巖)에 대한 경제권을 인정받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장무공(박윤웅)이 받은 채지와 곽암은 고려 정부가 지급한 녹읍이었다.
 장무공(박윤웅)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신라 후기 국제 무역항으로서 울산항이 위치한 울산광역시 중구 반구동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달천광산의 철과 농소의 채지에서 생산된 농산물, 곽암으로 대표되는 해산물을 바탕으로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울산의 지방 세력이었다. 고려 시대부터 장무공(박윤웅)은 울산의 수호신인 계변천신(戒邊天神)이자 성황당의 신으로 모셔졌다.

1851(철종31) 경상남도 양산시 용당동에 장무공(박윤웅)을 제향하는 용강사를 건립하였다. 1986년 용강사를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으로 옮기면서 학산서원 이라고 개칭하였다.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한다 

 

 

대통령 서한문(大統領 書翰文)

곽암[사채암(賜采巖)]환원에 대한 대통령서한문 (藿巖還元에 對한 大統領 書翰文)

每仰南州節義之世家也心拇於

(매앙남주절의지세가야심무어)

尊軒旣積且久意以一​趨於千古之下志今亦未之爲負於

​(존헌기적차구의이일추어천고지하지금역미지위부어)

幽明之間何大何慢願不辜則幸甚惟冀尊安只此書

(유명지간하대하만원불고칙행심유기존안지차서)

​一九六六年 二月 二日

大統領 朴正熙

朴 駿 浩 貴下   龍岡壇所內​

해설 : ​

매양 영남지방의 절의 있는 집안을 우러러 마음속으로 존헌을 손꼽아 온지 오래되어 한번 千古의 옛 자취를 찾고저 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아직까지 못하여 유명간(幽明間)에 저버림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이처럼 만흘(慢忽) 할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허물하지 않으면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오직 존체의 만안을 빌며 이만.

1966년 2월 2일 대통령 박정희

용강단소 박준호 귀하

대통령비서실장 통고문(大統領秘書室長 通告文)

謹啓(근계)

貴先祖興麗伯藿巖事承
(귀선조흥려백곽암사승)

大統領閣下 還元之命 通告於 慶南知事及

(대통령각하 환원지명 통고어 경남지사및)

蔚州群守 蔚州郡江東面漁業組合長 諒下之是仰

(울주군수 울주군강동면어업조합장 양하지시앙)​

一九六六年 五月 三十日

大統領秘書室長 李厚洛

朴 駿 浩 貴下​

해설 :

근계

귀선조 흥려백의 곽암일에 대하여

대통령각하의 돌려 주라는 명령을 받들어 경남지사와 울주군수 및 강동면 어업조합장에게 통고 하였으니 양해 하시기 바람.

1966년 5월 30일

대통령비서실장 이후락

박준호 귀하

大統領特別諭示(藿巖還元)

西紀一九六六年十月十八日字 慶尙南道蔚州郡江東面舊柳里板只洞地先所在 미역바위(賜岩)는 從來 慣行에 따라 울산朴氏 宗中에서 無償으로 行使管理 토록 할것.

西紀一九六六年六月一四日

大統領 朴正熙 (印)

해설 :

서기1966년 10월 18일자 경상남도 울주군 강동면 구유리 판지동 지선소재 미역바위(사암)는 종래 관행에 따라 울산박씨 종중에서 무상으로 행사관리 토록 할것.

서기 1966년 6월 14일

대통령 박정희(인)

기념물

제 38 호

시지정 문화재 지정서(市指定 文化財 指定書)

명칭 : 곽암(藿巖)

수량 : 1개소

위 문화재를 울산광역시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함.

2001년 12월 20일

울산광역시장

울산광역시 고시 제2001-190호

울산광역시 지정문화재 지정고시

울산광역시 문화재보호조례 제31조. 제15조의 규정에 의하여 울산광역시 지정문화재를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01년 12월 20일

산광역시장

다음

종별 : 기념물

지정번호 : 제38호

명칭 : 곽암

수량 : 1개소

소재지 :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 판지마을 해수면하

주소 :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36-6

성명 : 울산박씨 대종회

어업권 허가(漁業權 許可)

서기1966년 5월 18일자 대통령특별유시에 의거 강동면 구유리 판지 소재 미역바위(곽암)는 종래 관행에 따라 울산박씨 종중에서 무상으로 행사 관리토록 할것

1966년 6월 14일

경상남도지사

 

학수당(鶴睡堂) 휘 홍춘(諱 弘春)(22世)의 환도(環刀)

(임진왜란 때 사용한 것이며 현재 울산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음)


- 종목 :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2013.08.16.)
- 크기 : 99.0×4.0㎝(칼), 80.0×5.8㎝(칼집)
- 내용 :
울산의 임진왜란 의병장인 학수당公(1537~1601)이 사용했던 칼과 칼집이다. 학수당公은 무과 급제 후 언양현감을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시기에는 의병장으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칼을 환도라고 부른 이유는 고리[환(環)]가 달린 칼집이 있어서 이 고리에 끈을 드리워 허리에 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도(腰刀), 패도(佩刀)라고 부르기도 한다. 길이 99cm이며 철제이다 칼의 손잡이는 나무로 쇠 부분을 덮었고, 그 위에 가죽 을 ×자 모양으로 감샀다. 손잡이 끝부분은 은상감으로 장식하였다. 칼날에는 칼등을 따라 날 끝까지 길게 피홈이 패어져 있다. 일반적인 조선시대 환도의 모습을 보인다. 다만 칼 손잡이와 칼날의 경계 부분[코등이]의 장식은 일본도의 요소도 보인다. 칼집은 나무로 만들었는데, 그 위에 어피로 장식하고 종이를 덧입혀 옻칠하였다. 칼집의 중간 부분 정도에 칼집 고리 2개와 끈목 장식이 남아 있다. 칼집 끝에도 은상감 흔적이 남아 있다. 칼 손잡이와 칼집 입구까지 불에 그을린 듯한 흔적이 있다.

환도는 칼의 전체적인 형태와 부분적인 처리 등에서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시대 환도나 이순신 장검과 유사성이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도 제작 기법과 활용 방식 등에서 조선시대 검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반오헌(伴鰲軒) 박계숙(朴繼叔) 23世 와

만회당(晩悔堂) 박취문(朴就文) 24世 父子의 유물
부북일기(赴北日記)
- 종목 :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2006.01.26.)
조선 후기 울산 출신 무신 박계숙과 박취문 부자의 직무 수행 일기.
[저자]

 박계숙(朴繼淑)[1569~1646]의 자는 비윤(丕胤), 호는 반오헌(伴鰲軒)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아버지 박홍춘(朴弘春)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 1594(선조 27) 무과에 급제하였다. 1605(선조 38) 함경도 회령의 군관으로 임명되어 약 1년간 근무하였다. 박취문(朴就文)(1617~1690)박계숙의 아들로, 자는 여장(汝章), 호는 만회당(晩悔堂)이다. 1644(인조 22) 무과에 급제해 곧바로 아버지가 근무했던 곳인 함경도 회령의 군관으로 임명되어 약 1년간 근무하였다.
  "부북일기(赴北日記)는 박계숙과 그의 아들 박취문이 약 40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 1년간씩 함경도 회령에서 초급 장교에 해당하는 군관으로 근무하면서 쓴 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울산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함경도 회령에서 군관으로 근무하는 특별한 경험을 자세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작성되었다. 박계숙과 박취문의 일기는 본래 별개의 것이었을 터이나 박취문 당대 또는 후손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둔 것이다. 간행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필사본으로 전해져오다가, 2012울산박물관에서 영인·번역하여 학술 총서로 간행하였다. 2006126일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791책의 필사본으로, 크기는 가로 19.0, 세로 27.0이다. 111행에 1행의 자수는 21자이다. 반듯한 해서체로 적혀 있어서 깔끔한 인상을 주며, 판독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다. 울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체 79장 중 박계숙의 일기가 24, 박취문의 일기가 5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계숙의 일기는 16051015일부터 160711일까지이고, 박취문의 일기는 1644129일부터 164644일까지이다. 각각의 일기 내용은 울산에서 출발해 근무지에 도착할 때까지, 근무 기간, 근무를 마치고 고향에 도착할 때까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근무 기간은 물론 오고 가는 여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근무 기간 중 활쏘기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다.
  "부북일기"는 문신 우위의 조선 사회에서 드물게 확인되는 무신이 남긴 일기 자료라는 점에서 희소가치가 있으며, 군관으로 근무할 때의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해 두었기 때문에 군관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박두세(朴斗世) (25世) 작품

1650 ∼ 1733

字는 사앙(士仰), 號는 동암(東巖)

 

내용

작중의 ‘나’라는 주인공은 충청도에 사는 선비이다. 1678년(숙종 4)에 과거에 낙방하고 귀향하던 도중, 소사(素砂)를 지나 요로원에 이르러 주막에 들게 된다. 우연히 동숙하게 된 서울 양반이 고단하고 초라한 행색의 시골 선비인 그를 멸시한다.

그는 짐짓 무식한 체하며, 서울 양반을 은근히 놀리면서 서울과 시골의 풍속(風俗)을 풍자한다. 서울 양반의 제의로 육담풍월(肉談風月)을 읊게 되자 서울 양반은 자기가 속은 것을 알고 교만하였던 언행을 부끄러워한다.

사색편론(四色偏論)·학문·수양 등 대화로 두 사람은 밤을 샌다. 서로 주고받은 여러 편의 시를 통하여 낙방한 선비로서 당대의 정치제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세태를 풍자한다. 이윽고 동창이 밝아오자 서로는 성명도 모른 채 헤어진다.

 

의의와 평가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하여 양반층의 횡포와 사회의 부패를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향토 양반들의 실태와 그들의 교만성을 서울 양반에게 빗대어 지적한다거나 양반의 허세에 초라한 향인의 모습으로 도전하는 풍자성은, 이 작품이 실기형태이면서도 문학적 기법을 갖추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세태묘사 부분은 사회사연구 측면에서 간접적 자료가 될 수 있다. 국문본 「요로원야화기」는 서울대학교 도서관 가람문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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